종말의 징조들
조금은 지난 일이지만 얼마전 미국에서 5-60대 쯤 보이는 목사 몇 분을 만났다. 서로 통성명을 하는 중에 한 목사가 자신은 한국에 있는 총신출신이라고 밝혔는데 이 말을 들은 다른 한 목사가 피식 웃으며, 총신은 요즘 귀신의 총집합소라고 하던데... 라고 들리는 듯 마는 듯한 작은 소리로 속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언 듯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들렸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귀국을 했다. 그리고 교회 사무실 책상에 놓여 있는 지난 주간 신문 1면을 보고서야 그 말하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신문 1면 중앙에 큰 글씨로 “교육부, 총신대 “ 김영우총장 파면 ”이란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총신대는 사당동에 위치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직영 신학대학으로 예장 합동의 생명줄이요, 신학과 신앙의 근본 본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학교의 대표와 법인 이사진18명 전원 “임원취임승인취소”법적조치를 대한민국 교육부로부터 받았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원래 교회와 신학교는 세상의 법률적 조치를 받기 전에 교회법으로 다스려져야 한다. 혹시 교회 안에 불미스러운 일이 부지 중에 일어 났을 때라도 아직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는 잘못을 분별하고 지적하고 회개하고 변화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법으로 할 수 없는 안하무인지경에 이르러 결국 세상 불신앙 자들의 판결을 받는 꼴이 되었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님은 분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총신은 요즘 귀신의 총집합소라는 비아냥이 아주 근거없이 폄하하는 발언만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8가지 不當이 그 원인이라고 교육부는 밝혀주고 있다. 부당이란 이치에 맞지 않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정도에 어긋나고 정당함에서 벗어난 것을 말한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표현하면 진리에서 어긋나고 진리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신학교를 진리의 전당이라고 하는데 그 신학교의 수장들이 진리에서 어긋나고 진리에서 벗어났다면 귀신과 사단 또는 마귀의 집단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다.
아니 좀 더 적극적인 표현을 하면 진리가 없는 곳에서 진리를 말하고 있다면 아주 극악한 고등 사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투자해도 모자랄 교비를 횡령하거나 배임하고 가장 공의롭게 시행되어야 할 교직원 채용 비리가 난무하고 학생들의 항의성 시위를 마치 쓰레기를 처리하듯 용역업체 직원들을 고용해서 무력으로 처리하고 임원들이 결원하면 빠르게 법적인 방법으로 보충하여 다수의 논의와 연구 그리고 협력을 통해 학교 운영이 되어야 마땅한데 결원된 임원을 보충하지 않고 법을 어기면서 학교 운영을 무리하게 하였다고 밝혀주고 있는 것을 본다.
학생들의 장학금을 주어도 모자라는 판에 무슨 소송을 했는지 부당하게 소송비와 심지어 누가 먹을 인삼인지 몰라도 부당한 인삼 구입비까지 드러났다고 하니 한 교단의 심볼인 총신에서 일어난 일로서 비판의 정도를 넘어 그 누추함과 수준이 참으로 안스럽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성경에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직전의 징조들 중에 교회와 성도들이 신앙의 정조를 버리고 배교할 것과 돈을 사랑하여 타락할 것 그리고 세속과 혼합되거나 불의와 타협하므로 진리와 공의가 약화될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소금이 그 맛을 잃고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된다고 하는 것처럼 지금이 바로 예언된 그 시대가 틀림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은 억수로 많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는 너무도 적은 시대,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많은 자들이 구원 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남은 자”만 구원이 되리라는 말씀이 더욱 가슴 깊이 울려온다.
또 다른 성경에서 신랑이 더디 오니 모두 졸며 자는 시대, 여유분의 기름을 가졌던지, 가지지 못했던지, 모두 자는 시대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어느 누가 진리에서 벗어났다고 정죄하기 전 나 자신부터 먼저 세속적 잠에서 타락의 졸음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나야 하지 않을까? 눈에 들보를 넣고 이웃의 눈에 티를 정죄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내가 남은 자가 되고 내가 주님이 인정하시는 의인 한 사람이 되어 그저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하는 시대라는 것을 새삼 깊이 느끼면서 자비로우신 주님께 긍휼을 바라는 간절한 기도만 드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