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국제중독신문 발행인 김도형 대표]
제 삼의 종말시대의 예배 개혁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히 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고로 지금도 미래에도 말씀이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요 12:48, 개역)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가라사대” “이르시되”“말씀하시되”로 요약된다. 하나님의 “가라사대 . 이르시되 . 말씀하시되”는 추호의 어김도 없이 “그대로 되니라” 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만 이것을 인간들이 오해하므로 발생하는 약간의 오차가 생긴다. 하나님의 이르시되 말씀하시되 가라사대는 결정적 성격과 진행적 성격이 있는데 이것을 혼동하므로 발생하는 오차이다. 다시 말하면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는 말씀은 결정적 선언이시다. 그러나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또는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은 진행적 성격의 선언이시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하나님의 절대적 결정적 성격의 선언과 인간이 준행 해 가야 할 진행적 성격의 선언을 이해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결정적 선언으로 인간에게 우주만물을 만들어 맡기셨다. 그리고 진행적 선언을 통해 인간에게 정복하고 다스려 가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바로 이 정복과 다스리라는 명령어의 속성에서 인간의 기술과 노력이 필요하고 연구와 발전의 정당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인간이 지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기술과 의학과 과학 지식 등이 하나님과 대치되거나 상반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학문과 기술을 발전시키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다만 이 진행형적 하나님의 선언에는 불변의 전제된 하나님의 분명하고 명확한 의지와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은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제일 전제이다. 그리고 두 번 째는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선언이며, 세 번 째는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는 말씀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온 세상의 모든 기술 과학과 지식의 발전은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다. 미지의 세계를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도 인간의 마땅한 사명이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중심이 하나님을 위하여 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대적 사단의 일이며 결국 바벨탑처럼 처참하게 무너져버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진실은 무엇인가? 종교주의 예배, 샤머니즘 예배, 인간 중심의 자만족 및 환호성 예배, 자연숭배 예배, 이런 예배가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는 말씀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의 좀 더 깊은 영적 표현은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형식적이거나 인간편에서의 조작된 예배가 전부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의 조작된 방법이 배제된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 영적 예배는 또 다른 표현으로 “살아 있는 제사”라고 말하고 그 예배를 인간의 “몸”으로 드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사용한 몸은 (소마)로 몸, 신체, 육체, 형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순전히 영만을 말하지 않고 신체 육체를 포함한 예배를 드리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나 육체를 가지고 어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인가?
불교처럼 108번 절을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방인들의 메카를 향해 무릎이 다 까지고 손발이 다 깨지도록 삼보 일배를 수십 수백킬로미터를 하는 것처럼 해야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시지프스의 죄인처럼 끊임 없이 무거운 돌짐을 산 꼭대기로 나르고 굴리고 또 나르고를 반복하는 것인가? 또 아니면 자기 배를 가르는 활복을 통해 신에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 이런 유형의 예배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유사예배 행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롬12장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는 말씀은 과연 무엇인가? 너무도 간단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주심 같이 기독교인들은 이웃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과 헌신과 봉사로 일관된 생활을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은 자, 곧 소자들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인간적 이해의 상황설정을 통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대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예배를 마태복음 5장을 통해서는 소금과 빛된 삶으로 좀 더 구체적인 예배관을 명시해주고 있다.
가끔 얼마전부터 예배가 회복되어야 기독교가 산다는 말이 돌아다닌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회복되어야 할 예배가 종교주의 경건주의 조작주의 예배라면 관점이 틀린 것이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유대 종교주의자들의 왜곡된 진리에 대한 기독교 개혁의 1차 주역을 예수 그리스도로 본다면 이차 개혁은 타락한 중세 카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개혁주의 자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제 삼차 어쩌면 종말시대의 개혁은 조작화되고 인본주의 중심이 된 예배, 샤머니즘화된 기독교 예배가 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배라는 말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의미에 비추어 본다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거나 어기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교회당에서 드리는 아주 작은 시간 예배이거나 특별히 세속을 떠나 경건을 추구하는 그런 형태의 예배는 아닐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예배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생활속에서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참 예배인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중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말씀이 핵심이 되며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없는 예배는 죽은 예배이다. 당연히 죽은 믿음을 가진 자들이 행하는 예배행위가 될 것이다. 열매맺지 않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 는 말씀에서도 열매는 교회당에서 맺을 수는 없다. 어느 깊은 산속 굴속에서 금식하며 맺을 열매도 없다. 열매는 세속의 비바람 속에서 진리의 양분을 받고 은혜의 태양 빛을 받으며 성령님의 은혜의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는 나무에게서 아름답고 향기나는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아름다운 예배 중 최상의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교회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가나안 교인이나 무교회주의 자들은 절대 진리의 사람들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연약성과 한계성은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지상 교회에 모여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서 신앙의 힘을 얻고 성도의 교제들을 통해 강해지며 그렇게 얻은 은혜에 입각한 권능을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께 전 삶을 예배적 삶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현대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관점에로의 예배관과 신앙관으로 개혁되고 성장되지 않는다면 향 후 기독교는 소망이 없는 빈 껍질만 남게 될 것이다. 이런 말씀의 의미들은 “(막 12:33, 개역)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을 통해서도 인지할 수 있고 또한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사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사 1: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는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고 드리고 있는 조작된 예배 행위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예배는 생활속에 이웃들과의 관계성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사랑하는 동역자 및 성도여러분 종말의 시대에 오직 성경으로 제 삼의 개혁자들이 되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생활속의 예배로 개혁하는 신실한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